진주사범

허만길 문학박사와 국어학자 최현배 박사와의 만남

고향길 2023. 1. 13. 20:07

(이수기 친구가 추천해온 글)

화제(주간한국문학신문)
2021. 9. 1

허만길문학박사와 최현배박사

허만길 문학박사 <월간 신문예> 초대수필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 박사님과의 만남’ 화제
18살 국어과 중학교교원자격증, 19살 국어과 고등학교교원자격증 취득
미국 유학지원 제의에 가정형편상 사양 후에도 깊은 사제관계

허만길 문학박사(시인, 소설가)가 <월간 신문예> 2021년 7•8월호(서울)에 초대수필로 실은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 박사님과의 만남’이 큰 화제를 낳고 있다. 17쪽에 걸친 회고 형식의 수필인데,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허만길 박사는 1960년 진주사범학교 3학년 재학 중 17살에 국가시행 중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에 응시하여 수석합격으로 18살에 국어과 중학교교원자격증을 받았다. 그리고 1962년 19살에 국가시행 고등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에 응시하여 수석합격으로 국어과 고등학교교원자격증을 받았다.

중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 및 고등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는 1차 전공과목 학력고사(필기시험)에 합격하면 2차 구술시험을 치르게 되는데, 학력고사 출제위원이 구술시험도 담당하였다. 허만길 박사는 중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 응시 때는 중학교 졸업장밖에 없었으므로, 학력고사에서 전공과목 국어과뿐만 아니라 공통과목으로서 교육학과 사회과목(정치, 경제, 법률, 사회, 문화, 교양 등 종합) 시험도 치르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서 실지수업 시험도 치러야 했다. 중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의 학력고사 및 구술시험 출제위원은 김형규 서울대학교 교수와 홍웅선 문교부 학무국장이었으며, 고등학교교원자격검정고시 학력고사 및 구술시험 출제위원은 최현배 한글학회 이사장과 김형규 서울대학교 교수였다.

최현배 박사가 허만길 박사에 대하여 알게 된 계기는 허만길 박사가 1962년 3월 최현배 박사에게 학회 활동에 관한 문의를 서신으로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허만길 박사는 최현배 박사로부터 1962년 3월 26일자로 쓴 편지를 3월 28일에 받았다. 허만길 박사를 서울 자택으로 초대하는 내용이었다. 그때 허만길 박사는 19살이었으며, 부산중앙초등학교 교사였다.

허만길은 4월 7일 아침 7시 30분 부산역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서울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신촌행 합승을 타고 대흥동에서 내렸다. 집 뒤편 현관 벨을 누르니, 한복을 입은 예순여섯 살의 최현배 박사가 허만길을 맞이했다.

허만길은 낮은 책상에 원고가 많이 놓인 방으로 들어가 최현배 박사에게 큰절을 올렸다. 허만길이 서울에 와서 대학 공부를 하겠다면 힘껏 도와주겠다고 했다. 허만길은 연세 많은 부모님의 외아들로서 직장을 그만두고 부모님 곁을 멀리 떠나올 수 없다고 했다. 큰집에는 할머니, 그리고 슬하에 아무도 없는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계시는데, 자신마저 직장도 없이 멀리 떠나 있게 된다면, 여간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열두 살 진주중학교 시절부터 고학을 하다 싶이 자립적으로 살아왔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큰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우선 부산에서 야간대학을 마치고서 그 다음 일을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겠다고 했다. 최 박사는 한글 연구에 어울리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를 찾기 어려운데 허만길이 한글 연구의 뒤를 크게 이어 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허만길은 “박사님의 격려만으로도 고맙고 영광스럽기 그지없다.”고 했다.

최 박사는 허만길이 정녕 남의 도움 받기가 싫다면, 최 박사의 집에 묵으면서 원고 정리를 한 대가로 학비에 사용하면 될 것이 아니냐고 했다. 원하기만 하면 미국 유학까지도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허만길은 부딪쳐 있는 환경으로는 안정된 직장을 유지하면서 앞날을 열어 나가는 것이 떳떳한 일이 되겠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허만길은 과일과 차를 들고 난 뒤, 최 박사와 함께 사모님 방으로 갔다. 최 박사는 사모님에게 “나는 열일곱 살에 국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허 군은 열일곱 살에 국어과 중학교교원자격고시에 합격했으니, 참으로 기특한 재주지요? 가정 형편만 된다면 서울에 와서 공부하면 좋을 텐데.”라고 했다.

저녁식사가 일찍 들어왔다. 쇠고기 불고기가 상에 올려 있었다. 허만길은 어렵게 살아온 부모님과 가족들이 생각났다. 허만길은 부모님보다 더 좋은 밥과 반찬을 어찌 삼킬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앞을 가려, 고기반찬에는 젓가락을 대지 않고 밥과 나물과 간장으로만 식사를 조금 했다. 최 박사는 고기도 먹지 않고 식사를 그렇게 적게 해서 되느냐고 하며 걱정스러워 했다.

이튿날(4월 8일, 일요일) 아침이었다. 비는 그쳤고 날씨가 맑게 갤 것 같았다.

“허 군, 바람 쐬러 나오오.”

최 박사는 일찍 일어나, 뜰에서 어린 나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허만길은 어린 버드나무를 한 아름 안고 최 박사와 함께 큰길로 나갔다. 대흥극장과 철길이 있는 곳이었다. 길가에 버드나무들을 심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네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일요일인지라 그냥 놀러 나온 아이들이었다. 최 박사는 아이들에게 이제 심은 버드나무들을 몇 그루씩 배당해 주었다.

“이 나무는 너의 것이야. 네가 주인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각자에게 맡겨진 나무들을 잘 자라게 하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달리아와 홍초 뿌리를 나무상자에 가득 담아 이웃 가게에 주면서 이를 팔든지 나누어 주든지 하라고 했다.

아침 식사 후 허만길은 사모님의 안내로 서울 구경을 하기 위해 자가용에 탔다.

“허 군, 서울에 와서 공부하는 걸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최 박사의 간곡한 말에 허만길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창경원 구경을 하고, 혜화동에 있는 맏아드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덕수궁 구경을 한 뒤 오후 4시 부산행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이 뒤로 허만길은 최 박사뿐만 아니라, 최 박사의 가족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해(1962년) 여름 최 박사의 엽서를 받은 허만길은 8월 3일 부산 근처 일광해수욕장에서 최 박사, 최 박사의 친손자와 외손자, 안호상 철학박사, 최 박사의 제자인 부산고등학교 추월영 교장과 함께 만났다. 최 박사는 허만길에게 부산에서 야간 대학을 마치고 나면 대학원은 서울에서 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1963년 10월 29일에는 최 박사의 내외분이 부산을 거쳐 고향 울산으로 가는 길에 최 박사는 허만길이 근무하는 부산중앙초등학교를 방문했다. 최 박사는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가끔 특강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허만길을 찾았다. 허만길이 불면증을 겪고 있을 때 최 박사는 1964년 4월 9일 국제시장에 허만길을 데리고 나가 지아민과 핵사비타민을 사 주면서, 광복동 거리의 약방을 다니면서 불면증에 듣는 약을 알아보아 주기도 했다.

허만길이 1966년 7월 16일 한글학회부산지회 주최로 부산여자고등학교에서 연구 발표를 할 때 최 박사는 찬조 강연을 하였다. 1967년 최 박사는 허만길의 결혼 살림을 보기 위해 부산고등학교 추월영 교장과 함께 부산 초량동 셋방에서 허만길의 장모님이 장만한 생선국을 들면서 매우 맛나다고 했다.

허만길은 부산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로 재직한 뒤, 교원채용순위고사를 거쳐, 1967년 11월 23일(24살) 서울 영등포여자고등학교 교사로 발령받고서는 최 박사를 자주 뵙게 되었다.

그런데 1970년 3월 23일, 허만길은 출근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면서 ‘동양방송’(TBC) 라디오에서 나오는 아침 8시 뉴스를 듣다가 크게 놀랐다.

“외솔 최현배 선생이 세브란스병원 별관 524호실에서 오늘 새벽 3시 35분경 별세했습니다.”

최 박사는 1894년 10월 19일에 태어났으니, 76살 되는 해에 돌아가신 것이다.

허만길은 9시 50분경 세브란스 병원 별관 524호실에 들어섰다.

“선생님 …….” 하고, 허만길은 그만 목이 메었다.

국어학자 허 웅, 정인승, 김선기, 권승욱 님들이 먼저 와 있었고, 신문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국무회의에서는 최 박사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기로 가결하였다. 산소는 최 박사가 생전에 원한 대로 주시경 선생의 묘소와 가까운 곳으로 정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 양지바른 곳이었다. 3월 27일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영결식이 있었다. 허만길은 장례지도위원석에 앉았다. 최 박사의 영정(초상화)이 생전처럼 허만길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허만길은 새해 첫날 세배를 드렸을 때, 최 박사가 날씨가 풀리면 허만길의 집에 와 보겠다면서 약도까지 물었던 일이 생각났다. 허만길은 몇 사람과 함께 최 박사의 널을 영구차로 모신 뒤, 한글학회 직원 2명과 함께 정부의 문화공보부에서 내 준 차를 타고 행렬의 맨 앞장을 섰다. 영구차는 오후 3시경 장지에 도착했다. 장지에까지 조문객 700여 명이 따랐다.

하관이 끝나고 상주들은 먼저 서울로 가고, 허만길은 뒷일의 진행을 보고서 오후 6시경 서울로 출발하였다. 승용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걸어오면서 최 박사가 손 저으며 전송해 주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는 자꾸만 되돌아보았다.

“스승님, 편안히 쉬십시오.”라고 되풀이하면서, 고마웠던 일들을 곰곰 되돌아보았다.

■허만길

서울대학교 교육학석사(국어교육학과). 홍익대학교 문학박사(국문학과). 시인. 소설가. 1971년 복합문학 창시 및 첫 장편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출판(1980년).

17살 진주사범학교 학생회위원장 겸 학도호국단운영위원장으로서 진주의 4.19혁명 앞장. 1990년 정신대(일본군위안부) 문제 최초 단편소설 ‘원주민촌의 축제’ 발표. 1990년 중앙교육연수원 장학사로서 교원국외연수단을 인솔하여 아무 표적 없는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자리를 찾아 현장 즉흥시 ‘대한민국 상하이임시정부자리’를  읊고 귀국 후 임시정부자리 보존운동 성과. 문교부 국어과 편수관. 교육부 국제교육진흥원 강사. 한국교육과정평가원 해외동포용 ‘한국어’ 교재개발 연구위원. 학술원 국어연구소 표준어 사정위원. 서울대학교 국어교육연구소 ‘국어교육학사전’ 집필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한글학회 회원.

▲저서: ‘한국현대국어정책 연구’. ‘우리말 사랑의 길을 열면서’. ‘정신대 문제 제기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자리 보존운동회고’. 복합문학 ‘생명의 먼동을 더듬어’. 시집 ‘아침 강가에서’. 수필집 ‘진리를 찾아 이상을 찾아’. 장편소설 ‘천사 요레나와의 사랑’ 등

▲노래 작사: ‘백두산 바라보며’. ‘우리 자연 우리 환경’, ‘우정의 자리’, ‘여의도 꽃길’. ‘한강샛강다리’, ‘해운대 달밤’. ‘진주 비봉산’. ‘악성 우륵 찬가’, ‘내 아내여서 행복이네’ 등 20여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