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노년의 광장

고향길 2024. 11. 29. 12:26

25 0301

              지팡이

                 글/池達根

노인들의 용도로만 알고
무심히 바라보았던
지팡이!

세월속에
내게도 찾아온 걸 보니
나도 노인이 되였나 보구나

인생 여정속에
어쩌다 인연 되여
충직한 나의 도우미가 되였을까?

가자면 가고
서자면 서고
그리고 몸도 지탱해 주고......

아무런 댓가도 없이
끝없이 봉사만 하여주는
지팡이!

오늘도
묵묵히 시중을 들어주는
지고지순(志高志純)한
네 모습에 머리가 숙여진다

진정(眞情)
너는 나의 소유물이 아닌
내 인생의 스승이어라.
.
.
이 시를 읽으며 지팡이에 대한 시인의 깊은 애정과 존경이 느껴졌습니다.

단순히 노인의 보조 도구로만 여겨졌던 지팡이가, 인생의 여정 속에서 충직한 도우미이자 스승으로 자리 잡았다는 시인의 깨달음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지팡이는 몸을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지만, 시 속에서는 그것을 넘어 묵묵히 헌신하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끝없이 봉사만 하여주는"이라는 표현에서 지팡이가 마치 오랜 벗처럼 느껴졌습니다. 또한, 마지막 구절에서 지팡이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인생의 스승이라는 깨달음은 우리 삶 속에서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는 듯했습니다.

이 시를 통해,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존재들도 사실은 삶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따뜻한 시였습니다.


25 0202

조선일보여!

                    글/지달근

한 평생
국내외의 새소식을
신속 정확히 실어 날라 주었던
조선일보여!

오늘을 끝으로
구독 해지를 하고보니
가슴 한켠이 무너진듯 섭섭함이
가슴을 누르는구나

언제나
새벽 일찍 현관에나가
너를 반겼었는데......

언제나
너의 체취가
내 가슴 깊이 스며 들었었는데 ......

어쩌랴!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세월을 이기지 못한
노안(老眼)탓인것을!

회자정리(會者定離)란 말이 있듯이
너와의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보구나!

하지만
거자필반(去者必返)이란 말도 있거늘
천국에도 네가 있다면
널 다시 만날 수 있으리

조선일보여  안녕!

이 시는 오랜 세월 동안 구독했던 조선일보와의 이별을 담담하면서도 애틋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시의 화자는 조선일보를 단순한 신문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정을 나눈 대상처럼 묘사합니다.

느낌과 감상

이 시를 읽으면, 마치 오랜 친구와의 이별을 맞이하는 듯한 쓸쓸함과 아쉬움이 깊이 전해집니다. 특히 "한 평생 국내외의 새소식을 신속 정확히 실어 날라 주었던 조선일보여!"라는 구절에서는 신문이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 세상의 소식을 전하는 충실한 동반자였음을 강조합니다.

화자는 매일 아침 현관 앞에서 신문을 반겼고, 신문의 향기를 맡으며 삶의 한 부분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찾아온 노안(老眼)으로 인해 더 이상 신문을 읽을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구독을 해지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신문을 향한 정과 이별의 아쉬움이 잘 드러납니다.

시에서 "회자정리(會者定離)"와 "거자필반(去者必返)" 같은 한자 성어를 사용한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이별이 있고, 떠난 것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으로, 화자는 신문과의 이별을 인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심지어 "천국에도 네가 있다면 널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표현하며, 죽음 이후에도 조선일보를 다시 읽을 수 있기를 바라는 애정 어린 마음을 드러냅니다.

결론

이 시는 단순한 신문과 독자의 관계를 넘어, 한 개인이 오랜 세월 동안 신문과 맺어온 정서적 유대감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한 시대를 함께한 존재와 이별해야 하는 씁쓸함이 가슴 깊이 와닿으며, 동시에 화자의 담담한 태도가 더욱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신문이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의 일부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시입니다.

25 0105

👨‍👩‍👦‍👦 당신은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함께 할 친구가 있습니까 ?.

 대만에서
"미래의 노후"라는 주제로,
웹 영화가 많은 네티즌의 공감을
샀다고 합니다. 
 
영화속 줄거리는 산속에서
혼자 사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또 네명의 자식들은 모두 장성해
또 교수가 되었거나 해외에 나가
또사업를 하고 있고,
또노인만 자식들이 모두 떠난
또산골집에서 혼자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손자가 멀리서 찾아온다는
또소식에 그는 정성껏 맛있는
음식들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곧이어 오지 못한다는 전화를 받게되고,
준비했던 음식들은 주인을
잃고 맙니다. 
 
이때, 창밖의 하늘마저
우중충해지고 노인은 친구를 불러 함께
식사 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지만  누렇게 색이
바랜 낡은 수첩을 한참 동안
뒤적거려도  함께 식사할
만한 친구를  찾지 못합니다.  

마침내, 창밖에서는 비가
쏟아져 내리고,  결국 노인은,
부엌 식탁에  앉아 가득 차려진
또 음식을 홀로 먹게됩니다.  

마지막 장면
위로,
"인생의 마지막 10년을
함께할 친구가 있습니까?"라는
자막이 흐릅니다. 
 
대만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
'우뤄취안 著,
"우리는 그렇게 혼자가 된다"는 미래,
나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이 될지
잠시 명상에 잠기게 합니다''.. ! 
 
노후의 친구는
첫째: 가까이 있어야 하고
둘째: 자주 만나야 하며
셋째: 같은 취미면 더 좋습니다.

"회갑잔치가 사라지고," 
 ※ 인생칠십
고래희(人生七拾 古來稀)라는
칠순잔치도 사라진 지금,  
 
※ 인생백세
고래희(忍生百世古來稀)가
정답이 된 바이야흐로 초
고령화 시대 ! 
 
※ 60대는
노인 후보생으로 워밍업 단계요,
 ‐ 70대는 초로(初老)에 입문하고,
 - 80대는 중노인(中老人)을 거쳐,
또망백(望百)의 황혼길
 -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인생, 
 
※ 장수(長壽)가 좋기는 하나...,
 - 아족부행(我足不行) 
  내발로 못 가고,
 - 아수부식(我手不食)
  내 손으로 못 먹고,
- 아구부언(我口不言)
   내 입으로 말을 못하고,
- 아이부청(我耳不聽)
  내 귀로 못듣고.
- 아목부시(我目不視)
   내 눈으로 못 본다. 
 
※ 이렇다면 살아도 사는게 아니요,
  죽을맛이 아니겠는가? 
 ※ 그래서
- 첫째도 건강,
- 둘째도 건강,
건강이 최고의  가치이지요.~ 
 
 ※ 결코
젊은 날로 돌아갈 수는 없고,
다시한번  더 살아 볼 수도 없고, 
 ※ 한번 살다 끝나면
- 영원히 끝나는 일회용 인생인데,

오늘 하루도
뭐니뭐니해도 무탈없이
긍정의 힘으로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셋째도 건강  잘 챙기시고
아자아자 파이팅 하시길 바랍니다!,


24 1209

친구야  놀자

김옥교 재미교포 수필가

나이 팔십이 된 사람이 ‘친구야! 놀자’
하며 아직도 친구를 찾아다닌다면
좀 주책스럽기도 하고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늙어갈수록 친구가 필요하고
소중하게 느껴짐은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라스모어라는 은퇴 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매일 운동을 함께 하는
한인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아침 여덟시에 운동이 끝나면
우리는 ‘오늘은 어디 가서
커피를 마시고 아침을 먹지?’
하며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큰 테이블이 있는
맥도널드에 가고,
적게 모이면 타코벨에 간다.
타코벨에서는 멕시코계 여직원들을
잘 사귀어 놓아서 커피를 공짜로 준다.

1달러짜리 부리또나카사디아를 먹으면
단돈 1달러로 아침이 해결되니
미국이라는 축복의 땅에 살고 있는 것은
행운이라고 우리는 몇번씩 말하고
또 떠들어댄다.

요즘 이 은퇴 촌에도 슬슬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벌써
네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가까운 친구들의 남편 둘이 세상을 떠났고,
얼마 전에는 아주 친했던 친구
한명이 우리 곁을 떠났다.

알 수 없는 것은 금방 죽을 것 같던
사람은 안 죽고 생각지도 못했던
친구가 갑자기 떠나는 것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핸디캡이야.”
죽은 친구는 늘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이 요즘 사실로 증명이 되고 있다.
누군가는 눈이 나빠져 점점 실명이 돼 가고,
또 누군가는 귀가 안들려 반밖에 듣지 못하고,
별안간 이가 몽땅 빠져
하루아침에 폭삭 늙은
할망구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무릎이 아픈 것은 이제 애교고,
어지럼증 때문에 불평을 했더니
의사 말이 늙어서 그러니 그렇게 알고
그런대로 살라고 했단다.
그런 얘기까지 들으니 어디 억울해서
살겠나 생각까지 든다.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이
귀가 나빠진 것을 시로 썼다.
‘이제 귀가 반밖에 들리지 않아도 감사하다.’
이 한마디는 정말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팔십이 넘어서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말,
이젠 살만큼 살았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는다는 뜻,
지금 세상을 떠난다 해도
별로 억울할 것이 없다는
말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또 십년쯤 남보다 더 산다 해도
먼저 가고 나중 갈 뿐이지, 
가는 곳은 다 똑 같다.

아무리 오래 산다 해도
병원에 갇혀 산다면 그건 사는 게 아니고
인간의 존엄이란
눈 씻고 봐도 없어서 오히려
죽는 게 나을 것 같다.

얼마 전 치매가 와서 이젠 운전을 할 수 없다는
차량국의 통보를 받은 친구가 있다.
미국에서 운전을 못한다면
그건 치명적이다.
운전은 자유를 준다.
운전을 못한다면 살아도
반밖에 살지 못하는 것이나 같다.

또 한 이웃은 미나리를 뜯다가
넘어져 크게 다쳤다.
나이 구십의 이 할머니는
아직도 자신이 젊었다고 착각하고 살아서
벌써 몇 번을 넘어져 병원에 실려 갔다.

이젠 주변에서 같이 놀 수 있는 친구가
슬슬 줄어들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핑계들이 많다.

머리가 아파서, 어지럽고 기운이 없어서,

잠을 잘 못자서  함께 나가 놀자면 나갈 수가 없단다.

‘친구야! 놀자!’ 하며 달려갈 수 있는
친구가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 수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운전도 못하고
벤치에 앉아
빨리 오지 않는 버스를
마냥 기다리는 처지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처량하고
슬프지만 이것이 다 인생의
한 고비임을 깨닫는다.

그래도 아직은 ‘친구야! 놀자!’
하면 달려 나올 수 있는
친구가 몇 명 있다는 것이 새삼 위안이 된다.

<김옥교 수필가>


24 1129

새벽잠

            글/池達根

세월이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맛있던 단잠을
빼앗어 갔나

쏟아지던 꿀잠, 세월따라 가버리니
짧게만 느껴젔던 밤
一刻이 如三秋네

오늘도 非夢似夢
토막잠 이어오다
어김없이 깨진 꼭두새벽

세상은 아직 깊이 잠들었는데
세월을 갉이먹는 시계추 소리만
적막을 깨트린다

조간신문 발자국 소리
아직 안들리고
思念의 捕虜 속에 深淵을 游泳하다
애꿎은 라디오만 흔들어 깨웠네

黎明은
어디쯤 오는지
아직 소식이 없는데......  


새벽잠을 읽으며 마음이 깊이 울렸습니다. 세월이 빼앗아 간 단잠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무게를 느끼며, 그 안에 담긴 고독과 사색의 풍경이 그려졌습니다.

그렇게도 달콤했던 꿀잠이 세월 따라 사라지고, 밤이 길게 느껴지며 한 순간도 허투루 넘길 수 없게 된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옵니다.

특히, 비몽사몽의 상태로 맞이하는 새벽의 적막과 라디오를 깨우는 애틋한 장면은 마치 글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을 가집니다.

저 또한 새벽잠을 깨고 한참을 고요한 시간을 떠다닐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조용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와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게 되지요.

시계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려오는 적막 속에, 어딘가 떠나고 싶어지는 충동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머무는 나 자신이 교차합니다.

이 글을 통해,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새벽의 감정을 공감하며 위로를 받습니다.

비록 새벽의 고독이 깊고, 여명이 더디게 올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봅니다.

깊이 있는 글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