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사범

손수영 수필 감상

고향길 2022. 4. 2. 10:32

손수영의 수필감상 봄날은간다.m4a
7.49MB
수필가 손수영 / 사람에 취하다 2016

[문예시대 등단]
진주사범19기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부산문학회 회원

세친구의 시와 수필집
사람에 취하다 수필집
그 많은 날들 수필집


봄날은 간다

명치끝을 훑어 내리며 파동을 일으키고있는 노래가 있다. '봄날은 간다'다. 어머니의 환한 웃음에 대한 기억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두 개의 파동으로 '봄날은 간다'가 내게로 다가온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이 옛 노래가 젊은이들 사이에 불려지고있다. 그 인기로 영화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우리 세대와 아래 세대에서 외면 당하던 노래가 그 아래의 아랫 대인 이즈음에 뜨는 까닭은 뭘까. 반세기를 훌쩍 넘은 노래 이기에 어쩌면 새로운 맛으로 신세대가 받아들 였는지 모른다.

음악의 한 장르인 유행가도 패턴을 따라 순환 궤도를 돌고 도는 것 같다. 반세기 정도가 그 반환점인 모양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 가며 산 제비 넘나 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우리나라 시인이 '봄날은 간다'를 가장 좋아한다는 통계가 있다고 한다. 시적인 감각의 노랫말이나 고즈넉한 음조가 오히려 클래식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는 사람도있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나 자신도 모르게 아련한 추억을 소주잔과 함께 떠올리게된다.

화사한 노랫말과 애잔한 분위기가 묘하게 엇갈리며 소 주 석잔만큼의 쓰라림을 안겨주는 것이다. 뇌를 앓기 시작할 무렵, 미국에서 어머니를 보러 온 남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유혜숙 국장과 내가 창원의 한 노래방에 간 적이 있다. 노래방에서 어머니가 부른 노래가 '칠갑산'과 '봄날은 간다'였다. 그 노래, '봄날은 간다'가 어머니 생애에서 마지막 노래가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노랫말을 음미해 보면 펄럭이는 연분홍 치마의 끝자락처럼 허망함이 스며 난다. 헛된 맹세를 알뜰하게 믿고 기다리는 여자의 하염 없음이 넋이되어 봄바람에 너풀 거리는 듯하다. 따스하고 화사한 봄날의 기다림이 오히려 먹종이에 번지는 먹물 같은 슬픔으로 우러나는 것이다. 정옥이 이모가 우리 집에서 약혼식을했다.

음식을 간단히 차리고 이모와 어머니, 이모부 될 사람과 친구 몇 분이 참석한 조촐한 약혼식이었다. 식이 있으면 노래는 약방의 감초가 아닌가. 약혼식에도 예외는 없다. 이모가 노래 부를 차례 다. 이모에게서 노래를 끌어 낸다는 것은 동절기에 나뭇잎을 돈 안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이모의 등허리에는 굵게 땋아 내린 삼단 같은 검은 머리에 붉은 탱기가 곱기 만하다. 약혼식 날 아침이다. 어머니에게서 빌려 입을 연분홍 치맛단을

잡고 이모를 돕는 나 한테 다림질 감을 제대로 잡아주지 못한다고 야단 만 친 이모였다. 날 구박하던 그 씩씩함은 다 어디로 가고 저토록 고개를 들지 못하고 뺨만 붉 힌단 말인가. 돌변한 이모의 모습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이모는 참 예뻤다. 중신 아비 내 어머니는, 입술 한번 달싹이지 않는 이모에게 '봄날은 간다'를 불러 보라 며 옆구리를 쿡 찌른다. 드디어 이모 입술에서 얌전히 흘러 나오는 노래에 내가 얼마나 넋을 잃었던가 나만 넋을 잃었을까. 약혼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모두 아마도 감동 했으리라.

그런데 그 노래, '봄날은 간다'는 내 어머니의 입술에서 가만히 불려지고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웃음 많던 내 어머니의 청춘이 절어있는 노래가 되어 내 기억 판을 조이 질하고있다. 죽음의 신이 어머니 손을 잡던 그시기에 부른 그녀의 마지막 노래 이기에 더 애절한 지 모르겠다. 나의 청춘보다 어머니의 청춘이 더 아린 것은 거기에 내 사춘기가 묻어있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열 여덟에 시집을 갔기에 어머니의 봄날은 참 짧았다. 그나마 아버지가 없는 청춘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의 청춘이 봄날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밝은 웃음 때문이지 싶다. 그런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난생 처음 보게되었다. 한밤중이었는데 어디 선지 알게 모르게 흐느끼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온 얼굴이 눈물 범벅이되도록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술 한 잔 못하는 어머니 앞에 놓여있는 소주병에 내 조그만 가슴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 씩씩한 내 엄마가 울고 있구나.'난감하다.

어머니가 울고있는 모습이 싫었다. 그 밤 이후 내 생각 속 어머니의 봄날, 벚꽃 같이 화사하던 어머니의 청춘은 바람에 흩 날리는 벚꽃처럼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내 순수한 유년도 끝난 것 같았다. 어머니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뜸해지고부터 나는 내면 속으로 침몰해 갔다. 나의 청춘을 덧없이 흘려 버린 지금에서야 어머니의 봄날을 아련하게 그리워하고 아린 동통을 가슴 판에 돋을 새김하고있는 것이다. 아직도 나는 그 밤에 어머니가 운 까닭을 알지 못한다. 야트막한 산자락에 얌전히 엎드려 있는 우리 동네는 잡목들이 무성한 편이다.

나는 이 나뭇잎들의 움틈과 신록과 단풍과 낙엽과 낙하의 아름다움을 두고는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근육질의 검은 나무 둥치와 잎새들의 반짝임, 초록의 오묘한 변화 때문에 오래도록 이곳에 눌러 살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돌아가 신 곳이 여기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인생의 말미를 우리 집에서 보내면서 유독 꽃이 다 떨 어지고 없는 벚꽃 나무에 관심을 가졌다. 떨어져 버린 벚꽃의 꽃잎을 생각하며 자신의 연분홍 치마를 떠 올렸을까. 아니면 자신의 짧은 청춘을 보았을까. 화사한 꽃 일랑 깡그리 잊고 초록 잎으로 무성하게 빛나는 벚나무에서 오히려 인생의 끝을 알게되었는지 모른 다.

도통 말을 잊어 버린 어머니의 가슴속에는 '봄날은 간다'가 물결 치고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곧 벚꽃이 피고지는 계절이 온다. 벚꽃이 피고 질 때의 화사함을 사랑한다. 나비 떼처럼 휘날리는 꽃바람, 소낙비 같이 쏟아져 내리는 낙화에 검은 아스팔트 길이 꽃불을 켠 듯 환 해지면, 어머니의 봄날을 그려 보게된다.

그 화사함의 극치에서 오히려 나는 펑펑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내 어머니의 마지막 노래 '봄날은 간다'에는 벚꽃의 분분함과 순식간에 져 버린 어머니의 짧은 청춘과 생의 아픔을 알아 가던 나의 사춘기가 아물 거리고 있다. 누구에게나 봄날은 오고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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