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길을 내어이 왔던고 촉석루엔 달빛만 나무 기둥을 얼싸안고 아- 타향사리 심사를 위로할 줄 모르누나
진주라 천리길을 내 어이 왔던고 남강가에 외로이 피리 소리를 들을 적에 아- 모래알을 만지며 옛 노래를 불러본다
☞ 감상
이 노래는 1절, 2절이 겨우 3줄로 된, 노랫말이 결여된 노래지만 진주를 노래하는 대표곡으로 알려져 있다.
얼마전 까지 남북한이 모두 함께 부르던 가곡으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진주, 촉석루,타향살이 같은 단어가 들어 있어 거기에 아마도 사람의 감정이 매료되는 것 같다.
진주는 머나먼 옛날부터 사람이 많이 살던 유서 깊은 곳이다.
소제가 1986~1998년까지 25개 대학박물관의 발굴팀과 함께 진주 남강가의 들판을 발굴해 보았더니 대평면 일대에서 수없이 많은 선사시대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주로 3,500년 전후의 청동기가 대부분이지만 강 오른쪽에서 약 3만년전의 구석기가 나왔다.
배기동 교수(전,국립중앙박물관장)에 따르면 약 10만년전 구석기까지 묻혀 있는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사정상 더 발굴하지 못했다.
소제는 쏟아지는 선사유물을 보고 놀란 나머지, 진주를 <선사시대의 진주 특별시>라고 명명한 바 있다.
진주의 옛 이름이<거열주居列州>인데 발굴을 해보고 비로소 왜 그렇게 불렀는지 알수 있었다. 수천년동안 사람이 강가에서 열을 지어 살았기 때문에 <거열주>라 했던것이다.
아직 농사가 완전하지 못했던 3,500년전 당시, 다른강은 모두 여름철에 말라 비틀어져도 남강은 지리산으로부터 사시장철 내려오는 강물로 인하여 언제든지 배고프면 그물들고 나가 한두번만 던지면 식구들이 포식할수 있는 곳이기에 남강을 가장 좋아했던 것이다.
우리민족은 저 멀리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에서 이동해온 민족이다. 알타이산은 비행기로 약 5시간을 날아가도록 계속되는 큰 산맥으로서 골짝 골짝마다 사람이 살았고, 그들은 수천년에 걸쳐 동쪽 해뜨는 따뜻한 지방으로 이동해왔다.
남강은 살기좋은 곳이기에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보다 많은 인구수의 집단이 북방에서 밀고 내려오면 전투를 벌이다가 하는수 없이 자리를 피해주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것이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진주), 임나가야(김해), 대가야(고령) 등으로 번져나갔고 갈데가 없는 집단은 보성강, 영산강으로 진출, 뗏목을 만들어 타고 일본 쿠슈와 야마구찌로 건너갔던 것이다.
소제는 경낭도와 야마구찌현, 중국 산동성 등 3개지역이 자매결연을 맺는 바람에 일본 야마구찌현山口縣을 약 5차례 방문한바 있다. 거기서도 선사유물을 발굴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화살촉, 어망추, 석관묘 등이 한국의 선사유물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이것은 남강가에서 살다가 중과부적으로 전투에 져서 일본으로 건너온 남강 청동기인 들이 일본 큐슈전역과 혼슈의 야마구찌 까지 진출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수천년동안 일본 안에서 전쟁을 벌여 항전정신恒戰精神이 투철한 국민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남강가에서 쫒겨날 때의 비참한 전쟁 광경을 보고 생겨난 전통인 것이다.
항전정신恒戰精神이란 항상 전쟁이므로 평화시대에도 꾸준히 정보를 수집하는 등 전쟁준비를 하는것을 말한다.
최근에도 일본인들이 고대 일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함안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하여 집단으로 한국에 오지마는 그들이 거져 왔다가는 줄 아는가? 지금도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귀국하면 반드시 한국에서 보고 들은 새로운 정보를 정보국에 보고한다. 그 정보는 컴퓨터에 입력되어 유사시 전쟁정보로 활용된다.
일본은 22.3%가 한국인과 동일DNA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약 50%가 한국인과 같은 피를 갖고 있다.
백제의 태자가 건너가 일본 천황이 되었는가 하면 곳곳에 영주로 부임, 일본고대 문명을 펼치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삼국시대, 가야시대에도 많은 한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문화를 일으켰다.
그런 일본은 항상 한반도를 그리워하며 한반도에 가서 살고 싶어했다. 그것이 1592년 임진왜란이요, 1910년 한일합방이다. 그들은 앞으로도 쳐들어 올것이다.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한다.